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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고궁 나들이 3 (덕수궁)
    후기/여행 2010. 11. 26. 00:38

    덕수궁,

    *사적 124호

    *서울 중구 태평로 2가 58번지 (63,190㎡)

    *개장시간:09:00~21:00

    *관람소요시간:1시간

    *관람요금:\1,000원

    *교통편

    -2호선 시청역 12번출구 도보 5분

    -1호선 시청역 2번출구 도보 5분

     

     

     

    반 천 년 광화문 연가
    덕수궁 돌담길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조선조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이 덕수궁에서 일어났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 이른다. 덕수궁은 원래 그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 선조25)이 일어났다.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했고 한성의 궁궐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선조가 돌아와 머물 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궁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는 1593년 행궁에서 승하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행궁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해 이전하면서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했다. 후에는 계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西宮)이라 했다. 1623년에도 경운궁을 무대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인목대비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仁祖)를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이다. 인조 역시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왕이 된 지 8일이 지나 창덕궁으로 다시 이거했고 그 후로는 별궁으로 점점 노쇠해갔다. 1773년 영조 49년에 선조를 회상하며 사배례(四拜禮)를 치른 적이 있지만 궁궐로서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종 때다. 고종은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 대사관에서 환궁할 때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향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인 경복궁을 뒤로하고 열강들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대한제국(1897)을 세웠고 경운궁도 다시 궁궐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도 잠시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일제의 탄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고, 2년 후인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가 이뤄졌다. 순종은 왕위에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이궁했고 고종이 기거하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했다. 덕수(德壽)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계승한 후 정종은 태조의 거처에 상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덕수라는 시호를 올렸다. 그 후로는 상왕의 거처라는 의미를 가진 궁궐을 덕수궁이라 했다. 어떤 이유든 스스로 물러난 태조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서 내려온 고종의 처지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덕수궁 본래의 이름인 경운궁을 회복하자는 의견도 그에 기인한다.

    쓸쓸한 이름, 덕수(德壽)

    덕수궁에 들어가기 위해 대한문을 지난다. 수문장교대의식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멎는 명소다. 태평로의 상징이다. 하지만 원래의 위치는 아니다. 일제에 의해 태평로가 만들어지면서 덕수궁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대한문도 뒤쪽으로 물러났다. 대한문(大韓門)의 옛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으로 이 또한 경운궁의 정문은 아니었다. 중화전 앞쪽의 인화문(仁化門)이 정문 역할을 했으나 지리적 조건이 좋지 않아 대안문이 그 기능을 대신했다. 그 후 1906년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거기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안(安)’의 글자 모양이 갓을 쓴 여자를 닮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친일파 수양딸을 의미했기 때문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지만 고종의 독립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다. 대한문은 1968년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또다시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괜스레 너른 태평로가 무심하다.

    대한문을 지나 직진하면 중화문(보물 제819호)에 이른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입구로 인화문이 정문이던 시절에는 궁궐에서 만나는 첫 건물이었을 게다. 중화전 앞에는 정전답게 품계석이 도열해 있다. 중화전은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화재 후에 단층으로 중건됐다. 화재는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보물 제820호)의 온돌 공사 중 일어났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실로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궁궐 내 목조중층 건물인 석어당도 주목할 만하다. 석어당은 덕수궁의 역사다. 임진왜란 때 환도한 선조가 머물다 승하한 장소요, 인조반정 후 광해군이 유폐된 장소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게 특징이다. 물시계가 있는 보루각 자격루(국보 제229호)는 덕수궁 내 유일한 국보다. 창경궁에 있다가 옮겨왔다.

    덕수궁은 궁궐 안에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석조전은 우리나라의 20세기 초 서양식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서편의 서관은 1936년 이왕가미술관으로 지어졌고 현재는 덕수궁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두 건물 사이의 분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분수다. 이처럼 덕수궁에는 그저‘궁궐’로만 설명될 수 없는 많은 사연들이 남았다. 하지만 이 또한 경희궁과 덕수궁, 평리원(현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 사이에 구름다리(홍교)가 있었다는 기록처럼 아련하다.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인 듯하지만 우리의 민족사를 가로지르는 회한의 역사인 것을…. 이제 상왕의 강녕을 기원하던‘덕수(德壽)’는 후손들이 간직해야 할 사명으로 남았다.

     

    ▲대한문(덕수궁의정문)

    1897년(광무1년)대한제국 출범 직후 환구단이 건설되고 궁궐의 동측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면서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본래이름은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한것이라 한다.

     

    ▲중화문,정전인 중화전의 대문이다.

     

    ▲중화전

    덕수궁의 정전이다.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뒤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을 다시 세워 일으키며 대한제국의 위상이 깃들도록 정성을 쏟았다 한다.

     

    ▲세종대왕상

     

     

     

     

     

    ▲덕수궁 정원(돌담길 안쪽)의 만추

     

    ▲석조전

    고종황제가 침전겸 편전으로 사용하기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덕수궁에 서양식 건축물을 건립한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다.

     

    ▲광명전

    본래는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지금은 함녕전과 멀리 떨어진 석조전 맞은편 숲에 따로 서 있다.

     

     

     

     

     

     

    ▲▼마로니에 나무

     

     

     

    ▲덕수궁 후원의 가을 단풍

    길지는 않지만 궁궐내측 산책로를 따라 당신도 한번 걸어 보십시오,

    맘 가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겠지만 혼자라도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ㅎㅎㅎ

     

    ▲정관헌,(정관헌은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라 할수있다.고종은 이곳에서 외교관들과 연회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장소로 애용하였다 한다.

     

    ▲함영전

    고종의 침전이자 편전으로 사용되었고 승하한곳도 이곳이다.

    다른궁궐과 달리 덕수궁에 왕비의 침전이 따로 없는것은 명성왕후가 승하한 뒤,고종이 다시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유현문

    덕홍전에서 정관헌으로 이어지는 꽃담과 꽃담에 낸 무지개 모양의 유현문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한다.

     

     ▲은행나무

    잎은 낙엽되어 다 떨어졌고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린 은행들의 숫자는 조선왕조 500년의 낮과밤 만큼 되지않을까?

     

     ▲▼덕수궁 돌담길

    이길은 우리가요의 노랫말에도 많이 등장했고 건교부선정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상위에 오를 만큼 아름답고 사랑과 애환이 늘 함께 하는길이다,그리고 저 돌담 넘어엔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한을 간직한 궁궐,덕수궁이있다.

     

    후기를 마치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중의 명당이라는 한양의 중심축에 궁궐을 짓고 ‘새 왕조가 큰복을 누려 번영할것’이라는 의미의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욕의 시간 가운데 왕조는 500년이나 이어져 왔다.

    왕실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창덕궁,창경궁,덕수궁등 많은 궁궐이 지어 졌지만 수많은 변란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화재로 전소되거나 고의적인 훼손이 거듭되었다.그러나 해방이후 지속적인 복원으로 원형을 찾아 가고 있는것 같다.

    역사를 바로알고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보전 하는것은 새로운 우리문화를 창조 하는데 초석이 될것인즉 후손들을 위한 우리의 책무가 크다 하겠다. 그리고 내자녀의 손을 잡고 일년에 한번쯤은 고궁과 같은 역사문화의 현장을 찾도록 하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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