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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탐방 후기후기/산행 2012. 9. 29. 16:29
『병자호란의 치욕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삼전도 수항단에 올라 청태종을 향하여 3번 절하고 아홉던 머리를 조아리는 조선 인조임금의 등을 봐야만 했던 남한산성은 그 날의 한을 잊지 못한듯 오늘도 저 멀리 한수를 굽어보고있다. 지금은 경기도 도립공원이란 이름으로 매일같이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 드리고 있는 남한산성, 수치스럽지만 우리의 역사이기에 그 역사를 통한 깊은성찰과 우리의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 남한산성(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천연의요새로 중요한 역활을 하던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상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한곳이다.그러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예)의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성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하지 앓고 47일이나 항전할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압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4년(1626)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공 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 한봉선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동문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본성
▲ 성 안쪽 경사가 없는 평탄한 흙길, 울창한 수림의 그늘과 나무향은 상쾌함을 줍니다.
▲ 군포지(성을 지키기위한 초소건물이 있던자리)
▲ 북문, 전승문(戰勝門)
병자호란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군을 공격 하엿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전승문이라 한것은 그때의 패전을 잊지말라는 뜻이라 한다.
▲ 외부에서 본 성곽
▲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길
소나무 수림과 성곽의 조화가 참 운치 있어 보인다.
▲ 연주봉 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위해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벽을 더 둘러 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 하였다. 근래의 발굴조사 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 하였다.
▲ 연주봉에서 바라다본 하남시
▲ 서문
남문으로 들어 왔던 인조임금이 강화도가 함락되고 청군과의 전투에서 숫적으로 밀리고 엄동설한에 식량까지 떨어져 더 이상 버틸수 없다고 판단 47일의 항거를 접고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기 위해 이 문으로 나가 삼전도로 향했다
▲ 수어장대 · 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것을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는데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1987년)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 무망루
▲ 청량당(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쌓을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李 晦)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위해 건립되었다.
이 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 회는 죽을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 올것이라 예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이름이 청량산 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 제6암문· 서암문(西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수있는 시설도 설치 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이 외측 개구부(開口部)는 대부분 홍예식(虹霓式)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편거식(平据式)이다.
인조 15년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 남문( 南門 · 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4대문중 가장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 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 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 보호수 느티나무
▲ 외부에서 본 남문(지화문)
▲ 코스모스 성곽길
남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목 남장대터 일원엔 만개한 코스모스가 가을을 구가 하고 있다.
▲ 남장대 터
덩그란히 남아 있는 주춧돌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본다.
▲ 수문(水門)
성안의 물을 밖으로 내보내기위해 성곽밑에 설치했다
「오전 10시 30분 동문에서 시계 반대방향(북문쪽)으로 남한산성 성곽 안길을 따라 걸었다.
500m 안팍의 낮은 산봉들을 연결하여 지은 본성의 길이는 9,05km 한바퀴 도는데 4시간 30분이 소요 되었다.
물론 쉬는시간과 점심시간이 포함 되었기에 실재 걷는 시간은 3시간 정도 일것 같다.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가 병자호란 때 이성에 들어와 47일간의 항전을 치루다 역 부족으로 청태종에게 항복할수 밖에 없었던 치욕의 역사를 되세겨 봄으로서 지금 까지 잘못된 우리네 역사관은 없었는지 재인식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 장군의 혼을 모신 청량당, 모략에 의해 죽임을 당한후 그 넋을 기리면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귀중한 문화유산이 관리되고 있는데 건의하고 싶은 사안이 하나있다.
유적앞에 설치한 안내판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 많은 내 외국인들이 꼭 봐야하는 설명문의 활자가 다 지워지거나 훼손되어 문장의 연결이 어려운데도 방치해 두고 있으니 참 한심 스러웠다. 관리 주체의 빠른 시정을 요망한다.
그 동안 나와 같은 생각의 많은 민원이 제기됐을텐데 또 하나의 바보를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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