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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북원문화투어 후기후기/트레킹 2011. 6. 1. 15:23
『문화란 답습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오늘 디딘 발자국이 뒷날에 길이 되리니.』
아침 6시, 밖을 내다보니 아파트 마당이 젖어 있다. 기상청 예보가 또 빗 나갔음을 감지 하자 오늘의 일정이 염려 스럽다. 오전 10시 부터 원주 북원문화투어 탐방을 가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9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자동차 앞 유리창을 가끔은 닦아야 했다. 따뚜주차장엔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 오르니 몇몇 아는얼굴도 눈에 띈다. 주체측에서 탐방일정표등 관련 유인물 배포와 원주시 문화해설사 정재구선생 소개가 끝나자 버스가 움직인다, 맨 먼저 도착한 곳은 흥법사지가 있는 지정면 안창리 였다. 연세는 좀 들어 보여도 단단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소유자 정재구 선생의 박식한 해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끔 햇살이 보일 만큼 날씨도 호전 되어 오늘의 문화투어 참여를 잘한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나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갖는다 는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정표를 보니 오늘 돌아볼 6개소 모두 이미 가 본 곳이라 큰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막상 첫 해설을 들어보니 귀가 솔깃 해 짐을 어쩌랴.
1, 흥법사지(興法寺址)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5호(1984, 6, 2)
-소재지: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외 7필지
흥법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신라때 세워졌으며 임진왜란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부도(보물 제 365호), 진공대사 탑비가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 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보물 제463호)만이 남아 있다.
▲흥법사지 3층석탑(보물 제464호)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귀부및이수(보물 제363호) 전면▲ ▼후면
▲영봉산
흥법사지의 뒷산으로 풍수지리로 볼때 부처가 세상을 끌어 앉는듯한 형국이라한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2, 김제남 신도비(金悌男神道碑)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 21호
-소재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 67-3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그의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선조임금의 장인이었던 김제남(1562~161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선조 18년(1585)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활동을 시작 하였고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에는 이조좌랑에 까지 올랐다. 둘째딸이 선조의 둘째 비인 인목왕후로 채택되자 연흥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광해군5년(1613)에는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채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후에야 명예가 회복되어 그를 위한 사당을 지었고 이후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비는 거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구조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뒤를 향하고 있어 재미있는 모습이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이 가득 세겨 있다. 조선 인조 2년에 세운 비로 왕의 명령으로 그의 사당을 지을 때 함께 세워두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뒤를 향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김제남신도비와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 보호수(소고35m,둘래6m)
▲▼ 김제남의 사당
3,흥원창
고려시대에 지방에 설치 하였던 조창(漕倉)
흥원창은 고려 13개 조창의 하나로 원주 은섬포(銀蟾浦)에 있었다. 이러한 전국적인 조운체제가 정비된것은 992년(성종11)경으로 조창에서는 전년에 거두어 저장한 세미(稅米)를 이듬해 2월부터 4월가지 경창으로 운송 하였는데 흥원창에는 세미의 운송을 위하여 200석을 적재할수있는 평지선(平底船) 21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판관이 파견되어 창고와 운송업무를 관장 하였으며 중앙에서는 감창사를 파견하여 때때로 발생 하는 세미의 횡령과 기타 부정행위를 조사 감독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후기에는 관선조운(官船漕運)이 쇠퇴하고 사선업자에 의한 임운(賃運)이 행해지면서 그 기능은 쇠퇴하였다.
▲흥원창 표지석
현존하는 유적이 전혀 없어 아쉬움이 컸다.
▲섬강과 한강이 만나는 흥원창 옛터.
우측이 원주와 횡성지역에서 흘러온 섬강, 정면으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남한강이며 우측의산은 경기도여주땅이고 좌측에 보이는 산은 충북 충주 땅으로 이곳이 3도의 접경이다.
▲4대강 사업이 한창인 흥원창 지역의 남한강. 강건너가 충북 충주, 오른쪽은 원주시 부론면이다.
원주시 문화해설사 정재구 선생의 흥원창 이야기가 구수하게 펼쳐지고 있다.
4, 법천사지(法泉寺址)
-사적 제466호
-소재지: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9 외
-면적:142,122㎡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문헌에 전하는 법천사는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 하였으며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 하면서 크게 융성 하였다가 임진왜란때 전소 되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과 탑비(塔碑, 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 졌는데 그 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으며 법천사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묘탑지와 부도전지, 당간지주등이 남아있다. 2001년부터 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 (984~1070) 현묘탑비(국보 제59호) 는 지광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 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광국사 현묘탑비와 거북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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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국사탑비 주변 석물
▲잔존석물
▲잔존석물
▲당간지주
▲발굴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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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한 연화대석
▲발굴중인 방구둘
▲사당터(절이 없어진뒤 개인이 만든 사당으로 추정)
5, 거돈사지(居頓寺址)
-사적 제168호(1968, 12, 19)
-소재지: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9
-면적:25,339㎡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2층 건물이엇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 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 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기의 절터로서 보기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만한 곳이다.
▲거돈사지(사적 제 168호)
▲원공국사 승묘탑비(보물 제 78호)
▲원공국사승묘탑비 거북받침돌
특이한것은 오른쪽 발톱 부분이 잘려 나갔다.
▲삼층석탑
▲수령 1, 000년의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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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기념사진
▲금당(법당)내부 한가운데에 자리한 불상좌대
▲절터의 석축과 수령 1천년의 느티나무
6, 경순왕(敬順王) 경천묘(敬天廟)
경순왕은 신라 제 56대 왕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사직을 보전할 힘이 없게 되자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기고 명산을 찾아 유랑하다가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정상에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순왕이 죽게 되자 그 를 따르던 신하들과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것이 영정각의 시발이었다 한다. 고려 중기에 영정각이 무너지고 인적이 끊어 졌다가 조선조 영조때 재건 하면서 영정각의 명칭을 임금이 경천묘로 하사 하였다. 그 후 경천묘는 소실되어 버렸으나 경순왕이 머물렀던 유래에 따라 이곳의 명칭이 귀래면 이라 불리워지게 된점과 무고한 신라인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신라 천년의 문화를 지켜낸 왕의 충정을 기리고자 원주시는 2006년 9월 이곳 미륵산 아래에 경천묘를 복원 하였다.
▲경천묘의 조감도
▲경천묘 중건비
▲문화해설 장면
▲경천묘로 통하는 신문(神門)
경천묘(경순왕의 화상이 봉안된 사당)
▲경천묘 앞의 조망
◆ 탐방중에 만난 5월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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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붓꽃
▲금낭화
▲작약(함박꽃)
▲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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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리
▲불두화
▲쑥부쟁이
◆ 후기를 마치며
사실 행사 내용도 모른체 지인의 권유로 참가 신청은 했으나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로 망설임도 컸었다. 그러나 결과는 내고장 문화유적 탐방에 참여한것을 자랑 스럽게 생각 한다. 오늘 탐방한 대상 6곳중 2곳은 조선 역사속의 중요인물과 세제 제도를 알아볼수있는 곳이요 3개소는 절터로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문화를 헤아려 볼수 있는 대 가람 이었다. 신라와 고려시대엔 지금처럼 절집들이 깊은 산중이 아닌 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경작지를 배경으로 지어진점을 볼때 당시의 불교는 생활종교 였음을 알수 있었다. 마지막 1곳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사당 경천묘인데 원주시 귀래면의 지명과 관련설도 한 이야기 거리가 될수 있을것이다. 탐방 대상 모두가 지금껏 한 두번은 둘러본 곳들이지만 정작 알맹이는 오늘 문화해설을 듣고서야 건진 샘이다. 그 와 더불어 당시의 정치문화등 역사공부도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다. 여행을 통해 뭔가를 안다는 것은 생활의 활력이 아닐수 없다. 듣고 보았는데도 미흡한것이 있다면 다시 자료를 찾아 보고 정리 하는 자체가 지식을 쌓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지역문화유적 탐방이 시민들의 정서와 고장사랑 고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것으로 생각 되는바 더 많은 시민들이 이런 기회를 접할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오늘 일정에 수고해 주신 관계자분들과 특히 72세라는 연령을 잊은듯 정열적으로 문화해설을 해주신 정재구 선생님께 감사한다.'후기 > 트레킹'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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