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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옛길을 가다후기/트레킹 2011. 5. 5. 14:44
『천하의 형태는 산천에서 볼수 있다.
산은 본디 하나의 뿌리로 부터 수 없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다.
물은 본디 다른 근원으로 부터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김정호 “대동여지도” 목관에서-▲제1관문(주흘관)의 서쪽 수구문을 빠져나온 조령천의 명경지수
「나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문경새재는 백두대간의 마패봉과 신선암봉의 마루금을 넘는 길고 험한 고개로 영남과 기호지방이 구획되고 또 연결 되었다. 조선조 초기 태종때 부터 시작된 길 개척은 선조 27년(1,594)에 제2관문(조곡관)이 설관되고 숙종34년(1,708)에 제1관문(주흘관)과 제3관문(조령관)이 설관 되는등 국방상의 요충지이며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과거길이요 체임(遞任) 하는 신,구 관찰사가 교인(交印) 하던 곳이며 임진왜란때 선조의 명을 받은 신립장군은 부장들의 극간을 듣지 않고 충주 탄금대로 물러나 배수의 진을 치고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장열히 전사한 아픈 역사도 안고 있다.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 그 거침없는 산맥은 유사이래 나라의 국경인가 하면 지역을 가르고 사람들의 왕래를 막았다. 대나무 마디처럼 등줄기에 업고 있는 고개들.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진고개, 선자령, 대관령, 싸리재, 죽령, 하늘재, 새재, 추풍령, 육십령등 이름난 고개만도 수 없이 많다. 이 고개들은 전혀 다른 두 세상을 잇는 유일한 통로이자 분기점이다. 고개로 인하여 영서와 영동, 영남과 기호, 호남과영남이 구획 되었고 또 연결 되었으며 때론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오랜역사를 지닌 문경새재 옛길은 명승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고 제1,2,3 관문은 1966,3,22 사적 제 147호로 지정되었으며 신길원 현감 충렬비등 지방유형문화재와 지방기념물, 문화재자료는 물론 길을 가던 선비들이 남겨 놓은 시비등 선조들의 삶의 애환과 역사,문화재 자료가 즐비 하고 빼어남 천혜의 자연은 사람들을 불어 모으기에 손색이 없다.
1981,6,4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새재 예길은 문화재복원은 물론 옛길박물관과 오픈세트장 을 건립하는등 종합관광단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체계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청정계곡수를 따라난 신작로는 부드러운 흙길로 조성 관리하여 맨발로도 걸을수 있으며 천혜의 자연숲이 뿜어 내는 피톤치드의 산림욕을 즐길수 있다. 가족이나 연인, 또는 맘 가는 사람과 함께 난이도가 약한 흙길과 군데군데 보존 관리되고 있는 옛 과거길을 번갈아 걸으며 하루를 보내는데 이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길은 본래 주인이 없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백두대간의 흐름을 처음 세운 성리학자 신경준)
▲옛길 박물관
「구간정보 (편도 7km 2시간소요.)
주차장-신길원 현감 충렬비-옛길박물관-제1관문(주흘관)-오픈세트장-조령원터-주막-교귀정-산불됴심비-응암폭포-제2관문(조곡관)-문경새재아리랑비-귀틀집-이진터-동화원-책바위-제3관문(조령관)」
▲제1관문앞 잔디광장(바람개비와 애두벌룬은 때맞춰 열리고 있는 문경전통 찻사발 축제를 알리는 홍보물이다)
▲물길과 사람길
▲영남 제1관(주흘관)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선정비 군
▲오픈세트장
원터(院址)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과 같았다. 화봉원에서 고려의 유희가 시를 읊는 것을 보아 고려 때부터 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근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여(廬-초막)가 있고 30리 숙(宿-여관)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쉬는 집) 5리에 단정(短亭-쉬는 작은 정자)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고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이나 기름진 땅 안에 있는 원에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었다.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에 있는 원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들에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院)이 없어도 잘 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 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조령산성 안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 요광원(要光院)이 있었다. 하늘재 밑에 관음원(觀音院)이 있고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고 전한다.조령원터 전경
조령원터
주막
물 박달나무 군락
교귀정
신,구 감사가 업무인계인수를 하던곳.
용담
산불됴심 비
물레방아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嶺南第2關)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鳥東門)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鳥谷關)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영남 제2관(조곡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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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아리랑비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길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때 굽이야 굽이야 눈물난다.˚
귀틀집
동화원터
신작로가 된 옛길
새재의 5월 개나리
낙동강 발원지(문경초점)
책바위
책바위 이야기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 하던길.
과거길은 출세의길 이라기보다 패가망신의 길 이었는지 모른다.
금의 환향의 환호작약은 거의 보이지 않고 대신 오랜 낙방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가난한 선비의 회한이 훨씬 많았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시귀가 많다. ˝옛가죽옷 떨어진지 몇해가 되었던가/천리길 풍상에 귀밑머리 희었구려/
높은 봉우린 눈에 덮혀 봄 늦게오고/돌다리엔 얼음얼어 말 걸음 더디네.” -전익상(1,634~1,697)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八作)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조령관과 옛과거길
백두대간 해발 650m의 저 문지방을 넘어서면 영남과 기호지방이 갈린다.
저쪽이 충북 괴산군 연풍면이다.
내리막 길의 시작 이지만 한양은 까마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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