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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사 가는길
    후기/트레킹 2011. 4. 7. 00:24

    ▲아침 뉴스의 일기예보를 보고 배낭을 챙겼다.

    내일 아침부터 모래까지 상당량의 비가 내린다 한다. 그렇다면 내일의 산행계획은 취소될께 뻔하니 햇살 좋은 오늘을 그냥 보낼수 없다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페 산행공지에도 우천시의 조치가 명시되어있음을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산행보다 가벼운 트래킹을 할 요량으로 판부면 금대유원지로 향했다. 치악산 국립공원 금대분소 아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영원사까지 걷기로 했다. 편도 5km쯤 되는데 이것 저것 살피며 사진 찍고 한눈 팔다보면 왕복 하는데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아래 주차장은 치악산 국립공원 초기에 만들어진건데 훗날 관리소가 마을밖으로  이전해 간후 대형차량만 사용하고 있어 아주 넓고 한적한데다 주차료도 받지 않아서 오늘 처럼 나 같은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10:00 아주 헐렁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봄볕이 완연한데다 바람 한점없으니 걷기에 딱 좋은 날씨다. 

     

    ▲옛날의 치악산 국립공원 금대분소

    현재는 비어 있으며 앞쪽이 주차장이다.

     

     ▲금대2리 마을과 영원사 가는길

     

     

     

    ▲집은 옛집 그대로인데 주인장이 바뀌었는지 돌담도 새로 쌓고 이것 저것 옛날 물건들을 전시 하듯 봄단장을 제법 해서 길손들의 눈길을 멈추게 한다.

     

    ▲치악산 여관인지 하늘아래 팬션인지

    10여년 전에 지은 여관인데 찾는이가 별로 없나 보다. 간판은 하늘아래 팬션으로 바뀌었는데 표지석의 여관 이름은 그대로이니-----.

     

    ▲그림 같은 별장

     

    ▲청정계곡의 작은 계류가 청아한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여기서도 길손의 발길은 멈춘다.

     

     

    ▲금대2리 가람마을의 당숲과 보호수 박달나무 (수령180년, 수고20m, 나무둘레200cm, 고유번호:강원-원주-65)

     

    ▲연안 김공 천석, 군석 피화 유적비(延安 金公 天錫, 君錫 避禍 遺跡碑)

    군석과 천석은 광해5년 계축화옥(癸丑禍獄)의 주모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손자로  화를 피해 영원사에 숨어지내다가 인조반정으로 화를 면하였으며 모두가 당파싸움에서 비롯된 허위였던 사실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계축화옥 (조선 역사)  [癸丑禍獄]

    1613년(광해군 5) 대북파가 일으킨 사옥.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고도 한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 간에 심한 암투가 있었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자 대북이 집권하였다. 이들은 먼저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는 구실로 소북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을 축출하는 한편 영창대군과 측근들을 박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1613년 3월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서얼 일당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칠서사건). 대북은 이 사건을 영창대군과 그 일파를 제거하는 데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이첨(李爾瞻)과 그 심복 김개(金闓)·김창후(金昌後) 등은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 등과 모의하여 국문 과정에서 서얼 일당에게 거짓 자백하도록 사주했다. 일당 가운데 박응서가 거짓 자백함으로써 옥사가 시작되었다. 박응서는 자신들이 1608년부터 명나라 사신을 죽임으로써 사회혼란을 일으키고 군자금을 비축하여 무사를 모아 정권을 장악하고, 성공한 뒤에는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게 하려 했다고 고변했다. 그리고 거사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살인했다고 하였다. 또 서양갑은 주모자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이며 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했다고 하였다.
    이로써 이 사건에 연좌된 종성판관 정협(鄭浹),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 등 일곱 대신과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황신(黃愼) 등 수십 명을 관련자로 몰아 가두었다. 또 전에 선조의 병이 위독해지자 일찍이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에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무당을 보내서 저주하였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하여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했다.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대북파가 정권을 완전 장악했으며, 1618년에는 인목대비마저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정권이 바뀌자, 이 사건은 대북파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기 위하여 단순 강도범 박응서 등을 이용하여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하였다.→ 칠서사건
     

     

    광해군 (光海君 1575∼1641(선조8∼인조19))

    조선 제15대 왕(재위 1608∼23).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이다. 1608년에 즉위하여 대북파의 책동으로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 능창대군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반면 명나라와 후금의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를 전개하였고 자주적· 실리적 외교로써 명(明)· 청(淸) 교체기의 국제정세에 대처하였다. 24년 인조반정으로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이배되어 41년에 죽었다.

     

    ▲지난해의 수해현장

    지난여름 수해로 무너진 제방과 유실된 도로가 1년이 다 되도록 방치되고 있다.

     

    ▲치악산 국립공원 금대분소

     

    ▲금대자동차 캠핑장의 공동취사장

     

     

    ▲영원사 가는길

    여기서 부터 걷기 좋은 흙길이 이어진다.

     

    ▲토종벌 사육농가

    지난해 전염병으로 모든 벌이 폐사하여 시름이 깊은 장생토봉원.

     

     

     

    여름 장마때나 호우가 올 경우 갑자기 불어나는 물 때문에 7개의 다리가 모두 잠수교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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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랗게 꽃망울을 터 뜨린 개울가의 생강나무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 길옆엔 겨울철 강설에 대비한 방활사가 준비되어 있다.

     

    ▲치악산 영원사 표지석

     

     

    ▲7교

     

     

    ▲영원산성입구

    영원산성[領願山城]

     

     

    시 대: 신라

    소재지: 강원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규 모: 둘레 4㎞

    지정사항: 강원도기념물 제27호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포곡식 석축 산성.
    치악산 남서쪽에 있는 산성으로, 지금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로 돌무더기처럼 쌓여 있다.
    대체적으로 상태가 좋은 동쪽 부분의 성벽 높이는 2m 가량이며 비교적 가지런히 쌓았다.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문무왕 때 쌓았다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892년(진성여왕 6)에 궁예가 치악산 석남사를 근거로 인근 고을을 공략하였다는《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궁예가 축조하고 근거한 성곽이 이 산성일 가능성이 많다. 산성의 당시 규모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3,749척이고 성 안에 우물 1개소, 샘 5개소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 합단군이 침입해 왔을 때 원주의 향공진사 원충갑(元沖甲)이 10여 차례에 걸쳐 적을 무찔러 이 성곽을 지킨 역사가 있으며, 또 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왜군과 대적하여 일부 적군을 무찔렀으나 힘의 부족으로 산성이 함락되어 그의 부인 이씨와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원주와 이웃 고을 주민들이 이 성에 들어와서 지키는 곳으로 근처 금대산성이나 해미성과 서로 의지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영원산성 전투

    날짜 1592년 음력 8월 23일~음력 8월 25일
    장소 강원도 원주 영원산성
    결과 일본의 승리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김제갑† 원주 목사
    김시백
    박종남
    모리 요시나리
    병력
    군민 4000명 3000명

    영원산성 전투임진왜란 초기 원주 목사 김제갑강원도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대항해 영원산성에서 벌인 항전으로 군민 모두가 항전하여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강원도 지역 중 유일하게 원주 백성들만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

    배경

    원주 목사 김제갑1591년 음력 11월 19일 68세의 늙은 나이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 탄금대 전투에 무기와 병력을 많이 지원하여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때 왜 제4진 모리 요시나리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삼척을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거쳐 8월 중순 원주를 향하고 있었다. 이에 김제갑원주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치악산 남쪽 기슭 영원산성으로 군민 4000명과 식량과 무기 한 달분을 가지고 들어갔다.

    전투 과정

    음력 8월 23일 일본군이 침입해오자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가리평이란 곳에 매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박종남은 명령을 듣지 않고 냇가에서 잠시 쉬어 목욕을 하다가 정찰을 나온 모리 요시나리의 군사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옷 한 벌도 챙기지 못하고 군사들만 잃고 돌아왔다. 모리는 원주를 점령하고 영원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여 총병력 3000명을 모두 이끌고 영원산성을 공격했다. 김제갑이 혈전을 벌여 활을 쏘다가 한 왜군의 총에 맞자 부장 중 오항이라는 선비가 달려와 김제갑을 부축하려하자 김제갑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활을 날리며 싸우다가 가까이 접근한 왜군의 총을 맞아 전사했다. 이어 둘째 아들 김시백이 후퇴 도중 아버지 김제갑의 시신을 거두려다가 똑같이 총에 맞아 전사했고 김제갑의 처 이씨도 남편과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결과 및 영향

    이 전투로 원주강원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유일하게 백성을 무사히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적은 이 전투로 위력이 반으로 줄어 강원도에서 왜군이 합류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영원사, 고즈넉한 작은 절집.

    연혁을 보면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영원산성의 수호사찰로 창건하였으며 폐사직전까지 가는 우여곡절끝에

    1990년에 부임한 현 주지 무이(無貳)스님이 대웅전과 산신각을 전통양식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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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사 입구 오르막 길 

    요시채 

    법당 

    소슬바람에도 은은한 풍경소리 


     

    치악산(雉岳山) 꿩설화

    옛날에 한 젊은이가 무과시험을 보려고 집을 떠나 몇일을 걸어서 적악산(赤岳山,지금의치악산) 고갯길을 넘게 되었는데 깊은 산골짜기에서 꿩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바로 길옆 바위밑에서 큰 구렁이가 알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돼 보이는 어린꿩들의 둥지를 응시 하며 입을 벌려 곧 잡아 먹으려는 순간이었다.좀 떨어진 곳에서는 어미꿩이 애타게 울부짖고 있었다.그 광경을 목격한 젊은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등에 메고있던 활에 화살을 걸고 힘껏 시위를 당겼다.팽 하고 날아간 화살이 구렁이 몸에 박히자 큰 구렁이는 꿈틀 거리다 죽어 버렸다.위기를 넘긴 어린꿩들은 날개를 퍼드덕 거리며 어미에게 다가 갔고 옆에서 울부짖던 어미꿩은 고맙다 는 듯 '꺼겅꿩'울면서 새끼들과 함께 먹이를 구하러 날아 올랐다.꿩을 구해준 젊은이는 고갯길을 서둘러 걸었으나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하룻밤 머물곳을 찾던중 산속에서 기와집 한채를 발견하고 그 집에서 묵게 되었다.젊은이는 소복차림의 젊은여인으로 부터 밥까지 얻어먹고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가슴이 답답해져 눈을뜨니 큰구렁이가 젊은이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구렁이는 "당신이 오늘 내남편을 활로 쏘아 죽였소,나와 남편도 전생에는 사람이었는데 탐욕이 많아 벌을 받고 구렁이가 되었소 남편의 원수를 갚기위해 당신을 이곳으로 유인 했으며,저 산위 빈절 종각에 있는 종을 세번 울리게 하면 당신을 살려 주겠소." 젊은이는 '이젠죽었구나' 낙담하고 있는데 그순간 어디선가 뗑,뗑,뗑, 세번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가 나자 구렁이는 감았던 젊은이의 몸을 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날이 밝고 젊은이가 종각에 올라보니 종각밑에 꿩 세마리가 머리가 깨진채 죽어 있었다.젊은이는 '말못하는 날 짐승이지만 죽음으로 보은(報恩)하였으니 내가 그 영혼을 달래주어야 겠다'.며 과거시험도 포기한채 꿩들을 묻어주고 빈절을 고쳐짓고 거기서 살았다.

    그절이 바로 지금의 상원사요, 그때 까지 단풍색이 고와 적악산이라 불리던 산이름도 붉을적(赤)자 대신 꿩치(雉)자를 넣어 치악산(雉岳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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